AI가 촉발한 전력 대란의 시대
인공지능(AI)이 세상을 바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에너지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ChatGPT 한 번의 질의응답에 필요한 전력은 일반 검색의 10배. GPT-3를 한 번 학습시키는 데 소모되는 전력은 미국 가정 120채가 1년간 사용하는 양에 달합니다.
국제에너지기구에 따르면 전 세계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는 2022년 460TWh에서 2030년 약 945TWh로 2배 이상 폭증할 전망입니다. 이는 전 세계 전력 소비 증가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규모입니다. 골드만삭스는 2023년 대비 최대 165% 증가를 예측했으며, 미국의 경우 최근 3년간 데이터센터 건설 지출이 3배 수준으로 급증했습니다.
수도권 집중의 위기: 한국의 현실
한국의 상황은 더욱 심각합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국내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의 약 70%가 수도권에 몰려 있으며, 이 추세가 지속되면 2029년에는 80%까지 확대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2023년 12월 기준 국내 데이터센터는 150개에 전력 수요는 1,986MW였지만, 2029년에는 637개로 늘어나며 전력 수요는 49,397MW까지 폭증할 전망입니다.
문제는 수도권에 자체 발전시설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신재생 에너지는 태양광은 내륙, 풍력은 해안과 제주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수요는 수도권에 몰려 있어 생산지와 소비지의 불일치가 심각합니다. 송전망 확충 없이는 안정적 전력 공급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한국전력거래소에 따르면 한국의 최대전력은 2039년 150GW를 거쳐 2051년 202GW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2024년 8월 최대전력이 100GW를 돌파한 지 향후 16년 안에 50%, 2051년경에는 2배로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특히 반도체와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가 2030년에는 2023년 수요의 2배 이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미국 전력망의 한계: 경고등이 켜졌다
블룸버그NEF의 2025년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는 현재 40GW에서 2035년 106GW로 300% 급증할 전망입니다. 워싱턴포스트는 펜실베이니아주에서 50년간 가동된 석탄 발전소 터에 필라델피아 도시권 전체 가구가 소비하는 전력량에 맞먹는 초대형 AI 데이터센터 건설이 진행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일리노이주에서 노스캐롤라이나주까지 6,500만 명에게 전력을 공급하는 PJM 전력망에서는 데이터센터로 인해 2025~2026년 용량 시장에서 93억 달러의 가격 인상이 발생했습니다. 메릴랜드주 서부 가정의 평균 전기 요금은 월 18달러, 오하이오주는 월 16달러 오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카네기멜론대 연구에 따르면 2030년까지 데이터센터와 암호화폐 채굴로 미국 평균 전기요금이 8% 증가할 수 있으며, 버지니아주 중부와 북부 같은 고수요 지역에서는 25%를 넘을 수 있습니다. PJM의 독립 감시기관은 전력망이 충분히 감당 가능한 경우에만 신규 데이터센터 연결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에너지 고속도로: 문제 해결의 핵심 인프라
정부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에너지 고속도로' 정책을 본격 추진하고 있습니다. 에너지 고속도로는 재생에너지 생산지와 소비지를 연결하고, 초고압 송전망, 스마트그리드, 에너지저장장치(ESS)를 결합하여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가능하게 하는 국가 차원의 전력 인프라입니다.
정동욱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는 "정부의 에너지 고속도로는 초고속 인터넷망처럼 국가 산업 구조를 바꿀 인프라가 될 것"이라며 "5년 내 실행력 있는 투자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정부의 국정과제인 에너지 고속도로 추진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력망 3법'(국가기간전력망 확충 특별법, 전원개발촉진법, 전기사업법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법안의 핵심은 민자사업 도입으로, 전력망 구축 사업의 문호를 민간 기업에 열어주되 한전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방식입니다.
초고압 직류송전(HVDC): 게임 체인저
에너지 고속도로의 핵심 기술은 초고압 직류송전(HVDC)입니다. HVDC는 기존 교류 송전 방식에 비해 장거리 송전 시 전력 손실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대용량 전력을 안정적으로 수송할 수 있습니다.
한국전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저항이 0인 초전도체를 전력망에 적용하는 혁신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초전도 송전 기술은 기존 구리 케이블보다 3~5배 많은 전류를 손실 없이 보내고, 갑작스러운 고장 발생 시 전류를 즉시 제한할 수 있는 초전도 전류제한기로 안전성을 확보합니다.
한전은 23kV 케이블 개발에 성공한 이후 변압기-모선, 변전소-변전소, 변전소-스테이션-변전소 등 3세대에 걸쳐 초전도 기술 실증 및 사업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2025년 7월에는 세계 최초로 데이터센터에 초전도 전력시스템을 적용하는 새로운 전력망 표준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에너지저장장치(ESS): 전력망의 완충제
ESS는 배터리, 플라이휠, 플로우배터리 등을 활용하여 일정 시간 동안 전력을 저장하고 다시 방전할 수 있는 설비입니다. AI 데이터센터의 고밀도 전력 수요 증가에 대응하여 전력 수요 폭증, 접속 대기, 전력 품질, 지속가능성이라는 네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핵심 인프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국내 ESS 시장은 2025~2026년 급성장이 예상됩니다. 데이터센터는 ESS를 통해 피크 시간대 전력망 부담을 줄이고, 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문제를 해결하며, 전력 품질을 안정화할 수 있습니다. 삼성SDI, LG에너지솔루션 등 국내 배터리 제조사들은 데이터센터용 ESS 시장에 적극 진출하고 있습니다.
스마트그리드: AI가 AI를 돕다
역설적이게도 AI가 만든 전력 문제를 AI가 해결하고 있습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등 빅테크 기업들은 AI 기반 전력 수요 예측 시스템을 구축하여 전력망의 안정성과 유연성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구글의 딥마인드는 머신러닝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가장 효율적으로 열 펌프를 가동할 수 있는 시간을 예측함으로써 데이터센터 냉각에 필요한 에너지를 낮추고 있습니다. 실제로 2008년 구글의 전력 사용 효율성(PUE)은 약 1.22였지만, 2021년 2분기 기준 1.1로 감소했습니다. 이는 전 세계 대규모 데이터센터의 평균 PUE인 1.57보다 0.56이나 낮은 수치입니다.
중국 정부는 국유 전력망 기업을 중심으로 AI 기반 실시간 부하 예측 및 재생에너지 출력 조정 시스템을 구축하고, 강화학습 기반 보조결정 시스템과 AI 조류(power flow) 계산, 무인 변전소 점검 등으로 스마트그리드 전환을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빅테크의 전략: 전력망 우선 원칙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구글 등 빅테크 기업들은 데이터센터 입지를 '전력망 우선 원칙'으로 최적화하고 있습니다. 재생에너지와 원자력을 결합한 장기 전력계약을 확대하며 안정적인 전력 공급 기반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무탄소 전력이 풍부하고 냉각에 유리한 한랭기후를 갖춘 북유럽에 12개 신규 데이터센터를 건설했습니다. 또한 펜실베이니아 원전과 837MW 규모의 20년 전력구매계약(PPA)을 체결했습니다. 구글은 2030년까지 소형모듈원전(SMR) 도입 계획을 발표했으며, 아마존은 원전 기반 960MW 데이터센터를 운영하고 SMR 5GW 확보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오픈AI와 오라클은 미국 수백만 가구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4.5GW 규모의 데이터센터 용량 확보에 나섰습니다. 엔비디아는 새로운 데이터센터 건립을 위해 오픈AI에 최대 1,00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국내 기업의 기회: 전력 인프라 시장 선점
LS일렉트릭은 국내 데이터센터 전력 인프라 공급의 70%를 담당하는 시장 1위 기업으로, 일론 머스크가 설립한 AI 개발사 xAI의 데이터센터에 전력 기기 부품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북미 지역 데이터센터 사업 수주액이 8,000억 원을 넘어서며 해외 시장 공략을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지엔씨에너지는 국내 데이터센터 비상발전기 시장 점유율 70%를 차지하며 2025년 상반기 전년 동기 대비 매출액 64.6%, 영업이익 408.4% 증가를 기록했습니다.
SK에코플랜트는 태양광, 풍력 등의 재생에너지 사업과 함께 고체산화물연료전지(SOFC) 사업을 적극 전개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 디지털엣지와 함께 조성 중인 부평 데이터센터는 국내 최초로 330kW 규모의 SOFC가 설치되어 보조 전력 공급원으로 활용될 예정입니다.
지역 분산: 지속가능한 성장의 길
수도권 집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데이터센터 지역 분산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보조금 지원, 세제 혜택, 금융 지원, 부지 임대료 할인 등 데이터센터 건설 지역 이전 시 인센티브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023년 비수도권 데이터센터에 대해 배전망 연결 시 케이블·개폐기 시설 부담금을 50% 할인하기로 했습니다. 지자체별로 냉각 효율이 높은 산간지역이나 댐 주변과 같이 데이터센터 가동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입지를 적극 활용하는 방법도 함께 추진되고 있습니다.
다만, 지역에서 데이터센터를 반기지 않는 분위기도 있습니다. 2019년 네이버는 경기 용인시에서 데이터센터를 건립하려 했으나 지역주민들의 반대로 사업을 접었습니다. 효성그룹이 2024년 경기 안양시에서 추진하던 데이터센터 건립도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사실상 무산됐습니다.
전력 효율화: 근본적 해법
데이터센터의 에너지 소비 분포를 보면 냉방에 드는 에너지가 50%, ICT 장비에 드는 에너지는 35%, 나머지 15%는 손실되는 에너지입니다. 컴퓨팅 장비가 사용하는 전력량보다 냉각을 위해 사용하는 전력량이 30%나 더 높습니다.
구글은 2011년 핀란드 항구도시 하미나에 데이터센터를 지어 차가운 바닷물을 끌어들여 냉각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14년부터 데이터센터를 해저에 설치하는 '프로젝트 나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편 차세대 고효율 반도체 개발도 전력 소비를 줄이는 핵심 방법입니다. 엔비디아, 인텔, 구글, 아마존 등은 GPU, TPU, ASIC 기반의 고효율 AI 프로세서를 개발하며 연산당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있습니다.
탄소 중립과의 균형: 피할 수 없는 과제
전망에 따르면 2030년대 중반까지 전 세계 데이터센터가 뉴욕, 시카고, 휴스턴 대도시권을 합친 만큼의 탄소 오염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한때 청정에너지만 사용하겠다고 약속했던 빅테크 기업들이 방향을 수정하고 있습니다.
구글은 2025년 환경영향 보고서에서 "기후목표 달성이 이제 모든 수준에서 더욱 복잡하고 어려워졌다"며 "2030년까지 모든 배출을 제거하겠다는 목표 달성이 매우 어렵게 됐다"고 인정했습니다.
IEA는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를 충족하는 1순위 에너지원이 천연가스가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가스발전은 2035년에 현재보다 약 175TWh 가량 증가할 전망이며, 주로 미국에 집중됩니다. 그러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전원은 재생에너지로, 2035년 약 450TWh 가량 증가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AI 시대의 도래는 전력 인프라의 근본적 혁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에너지 고속도로는 단순한 송전망 확충을 넘어 생산, 송배전, 저장, 소비를 통합하는 지능형 전력 생태계입니다.
초고압 직류송전, 초전도 케이블, ESS, 스마트그리드, 지역 분산, 고효율 반도체가 결합된 에너지 고속도로는 AI 시대 국가 경쟁력의 핵심 인프라입니다. 정부의 정책적 지원, 민간 기업의 적극적 투자, 지역사회의 협력이 함께 이루어질 때 지속가능한 AI 생태계가 구축될 수 있습니다.
앤디 로렌스 업타임 인스티튜트 연구 책임자는 "데이터센터가 없더라도 전력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역사상 유례없는 속도로 투자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에너지 고속도로는 초고속 인터넷망이 한국을 IT 강국으로 만들었듯이, 대한민국을 AI 시대의 선도국가로 만들 핵심 인프라입니다. 지금 우리가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AI 시대의 승자와 패자가 결정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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